April 9, 2016

세상은 생각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한참 前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약간 언덕진 골목 도로 한 가운데에 택시가 손님을 내리느라 잠시 정차한 상태였는데, 언덕 위쪽에서 학생 한 명이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한 눈을 팔았는지 정차된 택시를 들이받고 말았다. 택시와 부딪친 학생은 나가 떨어졌고 다리를 좀 다쳤는지 쓰러져 무릎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택시는 자전거와 부딪치면서 모서리가 긁히는 등의 흠이 좀 생겼다. 그런데, 택시 운전기사는 급히 택시에서 내려 차량 상태를 확인한다거나,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에게 다가가 '괜찮냐'는 식의 걱정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택시 안에서 한 동안을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만 있다가, 학생이 겨우 일어나 절뚝절뚝하며 걸음을 옮기는 상태가 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봐, 학생, 난 아까부터 아무 것도 안하고 있었어. 택시도 원래부터 안움직이고 가만히 있었고. 학생이 와서 들이받은 거야. 난 가만히 있었어. 자전거 여기 놔 두고 빨리 부모님 한테 가서 얘기하고 택시 수리비 갖고 와. 빨리 갔다 와라"

이 택시 운전기사는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을 향해 매정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최선의 행동을 취한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택시 운전기사는, 이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급히 택시에서 내려 상대방의 안위를 살펴주거나 걱정을 해주는 등의 호의(병원 이송 등)를 베풀다가 오히려, 나중에 가해자 입장 같은 것으로 몰려 곤란한 상황을 겪었을 듯도 싶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 경우, 매정해 보이는 택시 운전기사의 행동은 나름 대로 삶의 지혜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 이야기와 함께 또다른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거의 일(종군 위안부) 때문에 파렴치한 나라 비슷하게 취급받는 상황이다. 과거 일본이, 만약 오늘날의 저 택시 운전기사와 같은 식으로(매정하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전쟁중이라도 주변에 민간인은 항상 존재한다. 과거 소련군과 독일군의 경우, 전쟁중에,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는 연약한 민간인 아녀자를 대상으로 폭행을 일삼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 러시아나 독일은 역설적으로 '위안부' 같은 문제로는 시달리지 않는 듯하다. 전쟁중에 민간인 아녀자를 폭행하는 것은 보편적 여성인권 측면에서 보면 중대한 사안인데도 "과거 전쟁 때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향마저 보인다. 

일본 역시 그때에 위안부 같은 것에 신경 쓸 일 없이, 다른 나라(소련, 독일 등)가 했던 것 처럼, 전쟁터에 있는 민간인 아녀자를 주로 대상으로 삼았다면, 오히려 위안부 같은 문제로 오늘날 시달리는 일은 없었을 듯도 싶다. 일본측은, 위안부와 관련한 '軍의 관여'를 인정했다. 위안소의 설치, 이송, 위생관리에 軍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 일본군이, 위안부들이야 온갖 질병(풍토병, 성병 등)에 걸리든 말든 신경 안쓰고, 전황에 따라 급히 퇴각을 할 때도 위안부들이야 적(敵)에게 붙잡혀 고초를 치르던 말든 걸어서 도망치든 말든 차량에 안태워주고, 거처 또한 허허벌판에서 그냥 지내든 말든, 막사 같은 시설을 하나도 안지어 주고 완전히 모른 체 했었다면, 차라리 오늘날 일본은 '軍의 관여' 같은 불명예를 쓸 필요가 전혀 없었을 듯 싶다. 나아가, 상대적으로 깨끗한(의로운) 나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생각 만큼 단순한 것이 결코 아님을 가끔 느낀다. 위험한 것은, 단순히 현재의 잣대('높은 수준 인권' 등)만으로 과거를 마음대로 재단하는 부류들의 폭주다. 구상유취 수준의 자들이다. 이들은 툭하면, '정의'와 '인권' 등을 입에 달고 살지만,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도 없고, 이해심도 없다. 잘해 봐야 남들에게 이용이나 당하고 마는 수준의 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부류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안타깝고 개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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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관련 놀라운 점 세 가지" 


첫번째 놀라운 점)

강제연행의 객관적 증거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수 많은 사죄와, 보상을 얻어낸 한국인들의 수완.

두번째 놀라운 점)

증거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기적 같이, 수 많은 사죄와 보상을 얻어내고도 전혀 만족 못하고, 상대방을 향해 '더 내놓으라!'며 계속 덤벼드는 일부(많은) 한국인들의 끝없는 욕구.

가장 놀라운 점)

이러한 상대방이, 한국보다 국력이 약하거나 못사는 나라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국을 손쉽게골탕(경제, 금융, 안보분야 등) 먹일 수 있는 능력을충분히 보유한 나라라는 점.
=가장 놀라운 점은, 한국의 '무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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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人이야말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일본의 조선 병합에 대한 견해

<일본측>
극동을 향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은 근대화를 완수하고, 이웃인 조선과 함께 서구열강에 대항하고자 노력했지만, 조선은 華夷질서에 사로잡혀 일본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내부적 권력투쟁에만 주로 몰두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에 뒤쳐지게 되었고, 당시 국제사회의 격렬한 파고를 자력으로 이겨낼 수 없게 되어 결국 부득이 일본에게 병합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측>

조선보다 근대화를 먼저 이룩한 惡의 제국 일본이, 세계정복의 첫시작으로 평화롭게 지내던 조선의 풍부한 富를 약탈하기 위해 무력으로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그때까지 많은 문화와 문명을 전해주었는데도 일본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 원인으로서, 일본은 여러가지 자료를
기초로 사실을 추구하지만, 한국은 마음에 드는 자국의 모습을 애초 결론지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해당하는 자료를 모으는 등의 방법으로 맞추어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일본=惡, 조선=善'이라는 것이 미리 정해진 大전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과거에 일본이 조선에게 행한 善意가 무시되고 있다.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일본의 전쟁 승리로
청나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조선 내부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당시 조선은 신분제 사회로 계층이 구분된 사회구조였다. 일단 태어난 신분은 죽을 때까지 원칙적으로 그대로 유지되었고 신분 범위를 벗어난 결혼 같은 것도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시 조선의 일반국민들 가운데 20~40%가, 죽을 때까지 노예 계층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신분이었다. 아울러, 당시 대한제국 최대 정치단체였던 '일진회'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대해 적극 찬성했다. 적어도 조선내에서 병합에 대한 전국적 반대는 없었다. 그런데, 한국은 오늘날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고 전부 병합에 반대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토지정책


1910년부터 1919년에 걸쳐, 조선총독부는 토지 측량조사를 실시하여, 그때까지 주먹구구식으로 되어 있던 토지의 소유권 관계를 분명히했다. 원칙적으로 기존의 지주가 신고한 대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고, 신고가 없는 토지와 기존 국유지는 정식 국유지로 총독부가 접수했다. 이때 국유지로 편입된 것은 전체 토지의 10%도 안되었다.     

●교육


조선시대 당시 지식(교육)은, 지배층이 서민층을 지배하기 위한 것으로 독점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힘의 원천이라고 판단하고, 조선의 국력 향상을 위해 교육을 널리 일반화했다. 병합 전에 100개교에 불과했던 소학교는 최종적으로 4000개를 넘는 수준으로까지 증가했다. 고등교육으로는, 1924년 일본 여섯번째의 제국대학으로 경성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皇民化 정책 


간단히 말해, 병합에 의해 일본국민(일본국적)이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국가, 동일한 국민으로서 차별없이 내지(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을 펼친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명치유신 이전에, 약 400개의 번(藩)으로 나누어져 있던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천황을 元首로 삼은 통일국가가 되기 위해 실시했던 동화교육의 연장선이었다. 국기와 국가, 교육칙어 등을 강요했다고 지적하지만, 동일한 국가의 국민으로 존재하는 이상, 당연한 것이었으며, 교육칙어의 경우 오늘날 현대사회의 상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지극히 부합하는 내용들로서,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내용이다. 

●창씨개명

일본이 조선인의 이름을 빼앗았다는 식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지만, 1911년 시점에서, 일부 조선인이 일본풍의 성씨를 관청에 신고하는 일이 발생하여,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혼란을 이유로 일본풍 이름을 못쓰도록 제한하는 공문을 보낼 만큼 애초에는 이름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고자 했었다. 만약 총독부가 조선인을 계속 차별하고자 했다면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원래의 조선 이름을 쓰도록 계속 강제했을 것이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똑같이 가져가게 했다는 것은 (민족)차별을 조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3 comments:

  1.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하고, 일본정부가 고노담화를 발표한것도 정말 일본입장에서는 큰 실수였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은 정말 선의로 한 것이겠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나라들이 모두 선의로써 임하는 것은 아니죠. 상대가 사과한다고 그걸로 덮는게 아니라 계속 배상을 요구할게 뻔한 이치인데요. 국가전략으로서는 엄청난 미스였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위안부라는 소재를 아예 밥벌이수단으로 삼은 개인 혹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가 완전타결된다는건 자기들 밥줄이 끊긴다는 소리입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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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솔직히 말해서..이정도 쯤되면..오히려 일본이 당해도 싸다는 생각도 드네요.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던 점.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어물쩡 타협하면 끝나겠지~ 라고 생각했던 외교적 안이함의 축적.... 이정도쯤 되면..단순히 한국인만의 잘못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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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당해도 싼거로군요
    제가 젊어서 짐을 많이 들고 버스를 탓습니다

    내릴때 번거로워 한정거장 전에 미리 차비를 지불 했습니다
    당시엔 버스 차장이 있을때죠

    내리려고 하니깐 버스비를 또 요구 하는 겁니다
    아까 지불 했다고 했더니 차장이 언성을 높이는군요

    고성을 질러 대는 차장과 버스비 다투는게 이길수 없을것도 같고
    그러냐 그럼 한번더 받아라 하면서 또 버스비를 내고 내렸습니다

    제가 당해도 싼건가요?
    복수길님 차장이 큰소리로 악다구니 쓰면서 버스는 가지 않고
    승객들 여러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거 같아
    그냥 버스비 중복 지불 했습니다

    그냥 어거지에 지는거죠
    지는 제가 당해도 싼거로 하시겠습니까 ?
    뭐 그럴수도 있지요 이해할수 있습니다

    이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허지만 일본이 우리의 어거지에 지ㅐ는척 하는건
    그들이 우릴 사람으로 보지 않기에 그런 겁니다

    한마디로 상종못할 인간들의 어거지는 일본인들의 정직과 신용으로선 도조히 이해 불가라는거가 저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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